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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튀소재 주의

이름 지정하지 않는 양기훈 드림입니다 

미완성인데 더 안 쓸 것 같아서 그냥 올립니다......

 

 

 

 

1.

 

 남자는 여자의 말을 들어 보려는 체도 하지 않았다. 여자는 귀가 찢어질 듯한 클럽 음악과 방 안의 탁한 공기에 숨이 막혔고, 제 앞에서 희희낙락하고 있는 것이 아이의 생부인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애초에 함께 섹스를 즐긴 사람이라곤 저 남자뿐이기도 했다. 여자는 악에 받혀 고개를 제대로 가누지도 못했다. “니 애라고, 니 애. 개새끼야.”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의 분노가 일어나면 눈물조차 떨어지지 않는 법이었다.

 

 비싼 양주가 조금 남아 있던 잔에 담배꽁초가 떨어졌고, 여자는 입 밖으로 튀어나와 떨어질 듯 심장이 크게 뛰는 것을 들키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그럼, 내 애고 말고…….” 남자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적어도 여자는 남자가 자신을 밖으로 불러내어 사적인 이야기를 이어 나가 줄 정도의 요령은 있으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남자는 소파에 죽 늘어 앉은 동석자들에게서 피식피식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조차 제지하지 않았다. 운동복 한 겹으로 앞섶을 겨우 가린 어떤 여자는 날선 이를 드러내며 숨이 넘어갈 듯 웃기까지 했다. 그 여자는 바로 옆에서 벌어지는 질 낮은 치정극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했고……. “지우자, 공주야. 지워.” 새로운 한 개비에 불이 붙었고 순간 여자의 머리는 차가워졌다. “병원비는 줄 테니까…….” 오랫동안 연락을 받지 않아 화가 난 여자에게 뒤늦게 무성의한 사과를 할 때에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새벽녘의 섹스를 요구할 때에도, 그러고 나서 여자를 홀로 두고 침대를 떠나 버릴 때에도 남자는 여자를 단 한 번도 공주야, 하고 부른 적이 없었다. 아이를 지워 버리라 명령하는 남자의 목소리는 테킬라, 아니면 샴페인? 하고 묻던 그 한밤중의 그것과 소름 끼치게 똑같았다. “나 대학 가라고 배려해주는 거야, 기훈아?” 여자가 허탈하게 되물었다. 그녀는 이제 어떤 말을 해도 남자의 결정을 번복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다. “애 달고 학교 다닐 거 아니면 그게 낫지.” “그럼 너는?” “나?” 왜 갑자기 자신을 들먹이냐는 듯한 그 뻔뻔한 눈빛. 여자는 순간 가장 가까이 놓여 있던 술병을 잡아채 거꾸로 들었다. 병 안에 가득 채워져 있던 것이 여자의 팔뚝을 타고 쏟아져 온 방 안에 알싸한 향을 풍겼고, 여자는 남자의 눈앞까지 그것을 들이밀었지만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일평생 그것보다 더한 적의를 수도 없이 목전에 두어 봤을 사람이었다. 여자는 알고 있었지만 괜히 거친 말투로 그에게 조곤조곤 쏘아붙여 보았다. “씨발새끼야. 애는 혼자 만들어? 씨는 네 거라고. 애비가 돼서 자식을, 응?” 그러자 남자가 곧바로 받아 쳤다. “병신아. 생각을 해. 누가 낳아 달래? 네가 원한 애, 아니고. 내가 원한 애도 아니야. 그럼 내가 뭘 더 어떻게 해 줘야 하는데?”

여자는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놓았다. 그러자 와장창 하는 큰 소리와 함께 유리 파편이 사방으로 튀어나갔고, 

 

 일대는 순식간에 정적.

 

 

2.

 

 여자는 졸업을 한 학기 앞두고 돌연 자퇴계를 제출했다. 당연히 학교는 한바탕 뒤집어졌다. 여자는 입학 이래로 전교 1등을 단 한 번도 놓쳐본 적이 없었고, 모의고사 성적도 우수하니 졸업 후 굴지의 명문대에 입학해 남일고등학교의 위상을 드높일 것으로, 아주 당연하게 여겨지던 학생이었다. 그녀의 담임을 맡던 선생 하나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여자를 회유했다. 그러나 여자는 괜히 배가 아파 온다는 것을 핑계로 도망치듯 학교를 서둘러 벗어났다. 눈치가 조금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이 곤란한 상황을 잠시 모면하기 위한 귀여운 거짓말이며 보통 알면서도 대강 속아 넘어가 주는 것이 일반적인 매너라고 여기겠지만, 글쎄, 정말로 내장을 찌르는 어떤 것이 그녀의 뱃속에 잠자고 있으리라는 사실은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이 소식은 흐르고 흘러 격기반, 그 중에서도 외딴 섬 같았던 3반에도 들릴 듯 말 듯 전해졌다. “걔 진짜 자퇴했다는데.” “누구?” “네 여친.” “씨발, 꼴통아, 제발.” 남자는 질겅이며 씹던 껌을 그냥 퉤, 하고 뱉었다. 마주 서 있던 자경은 진짜 돈 부쳤어……, 아악, 씨발! 하며 나지막이 소리를 질렀고, 기훈은 묻는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미 두둑한 돈을 여자에게 부친 참이었다. 계좌에 선명히 새겨졌을 그의 이름 세 자, 동그라미 여섯 개, 애 하나. 그것이 양기훈이 마지막으로 여자에게 남긴 유산일 것이다. 이제 더 이상 그 여자를 볼 일은 없다. “그럼 이제 헤어진 거네.” 자경은 옷을 털며 물었다. “나를 다시 보려고 하겠냐.” “그럼 기분 풀러 가야지.” 남자는 순간 표정을 구겼다. “미친년. 넌 줘도 안 먹는다고.” “아니, 누가 뭐래? 오늘 매치 있으니 오랬다고……, 난 가서 좀 마시기나 하게.” 기훈은 입고 갈 옷이 뭐가 있으려나, 하고 잠깐 생각했다. 하지만 왠지 고민하기가 지겨워졌고, 그냥 타성에 젖어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자경은 그냥 하늘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 오겠어, 오늘은 공쳤다.” 기훈은 곧 장마가 몰려오겠다는 소식을 들은 기억이 났다. 하늘은 우중충했고, 홑겹의 여름 교복이 살에 달라붙는 날씨였다. 자경은 이제 가자, 하며 교정으로 돌아가는 길에 앞장을 섰다.

 

 

3.

 

 상극은 서로 이끌린다 했었나. 왜. 여자로선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짐을 싸서 어디로든 가 버릴 작정이었다. 어차피 조금만 기다리면 법적으로 성인이겠다, 피차 이렇게 된 거 있던 걸 없는 셈 만들자니 영 찝찝해 아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도망가버리는 게 낫겠다 생각한 것이다. 어차피 애미도, 애비도 서로 없던 사람인 체 여기며 살던 참이었다. 이미 가정사 영역에 있어서 받을 수 있는 상처란 상처는 모두 겪은 탓에 절대 가족 같은 것은 꾸리지 않겠다며 스스로 맹세했던 그녀였다. 그러나 정작 이리 들이치니 돌변할 수밖에 없었다, 상황이 사람을 바꾼다, 여자는 그리 반복해 중얼거리며 무작정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아직 겉으로는 애를 밴 게 티도 안 나는 상태일 터였지만 짐가방을 들어 올리는데 배가 괜히 묵직했다. 눈물이 날 것 같아 옆을 돌아보니 남자와 그를 배웅하는 여자와 아이, 세 사람이 서로 애틋한 포옹을 나누고 있었다. 남자는 아이를 받아 들어 한 번 입맞춘 다음, 여자에게 다음 주에 보자고, 잘 있으라고, 그리고 사랑한다고 속삭인 다음 캐리어를 번쩍 들어 짐칸에 실었다. 여자는 그 장면을 처음부터 못 본 체하며 단출한 제 짐을 마저 실었다. 한계까지 차오른 눈물에 번진 시야가 여자를 바깥으로부터 차단해 주고 있었다. 여자는 제 연인을 떠올리니 순간 머리가 멍해지고 차가워졌다. 그것은 한 번 무뎌지고 강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이제 꼴에 전교1등이라며, 모의고사 만점이라며, 우등생이라며 추켜세워지는 책상물림의 시대는 끝이 났구나. 고등학교를 중퇴한 여자와 아비가 없는 애 하나, 더 큰 파랑이 수도 없이 그녀 자신을 덮칠 것이라는 예감이 온 몸을 싸안았다. 그러나 동시에, 호로새끼 같았던 연인보다 바보같았던 과거의 자신을 원망하는 쪽이 더 편하리라는 멍청한 생각이 들었다. “우산을 안 가지고 왔네.” 이젠 그 어떤 것도 되돌릴 수 없었고, 도피하듯 뇌까리는 여자의 말이 끝나자마자 빗방울이 차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상극은 서로 이끌리지. 그게 사실이야.” 남자의 그 한 마디가 결정타였는지도 모르겠다. 아마 그 말을 들은 뒤로부터 그와 사랑에 빠지기로 결정했던 것 같다. 그것이 여자 혼자만의 사랑이었다고 해도 어쨌든 그녀는 분명히 그 결실을 품고 있었다. 존재한다면 이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러나 남자는 애초에 책임을 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처음 만난 날 그가 여자를 향해 던지듯 건넨 사과맛 주스가 터져 복도에 끈적한 자국을 남겨도, 격기반, 그것도 베일에 싸인 3반의 구성원, 그리고 얌전한 전교1등 간의 염문이라는 오묘하게 자극적인 소문이 온 학교에 돌아도 그는 책임을 지지 않았다. 그가 감당하는 것은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그의 세계는 외부로부터의 자극으로 온통 꽉 차 있어서, 그에 눌려 터지지 않게 자신을 유지하는 데 가진 전력을 모두 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거다. 그래서 이 남자의 무언가를 거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여기서 불행히도 여자가 간과한 것은, 자신은 공부만 잘했지 세상 물정에는 다소 순진했다는 사실과 남자는 보통 미친 놈에 철면피가 아니었을뿐더러 본인을 숨기고 꾸미는 데 능했다는 점이다. 남자는 첫 섹스 이후 건조하게 말했다. “원래 너 같은 애들이 벗겨 놓으면 섹스도 잘하고.” 그러나 여자는 못 들은 척 응? 하하. 하고 털어 버렸다. 사랑에 약간 돌아 버리면 어처구니가 완전히 나가 버려도 아랑곳하지 않게 된다. 그래서 그가 원하는 것은 여자의 다리 사이, 그 곳을 사용하는 잠깐의 섹스뿐임을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더군다나 여자는 그 때 비이성적이고 비정상적이며 불안정한 사랑이라는 환상에 푹 빠져 있는 상태여서, 섹스의 쾌락도 그 후의 자괴감도 자신이 선택한 것이며 이것이 신성한 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굳게 믿었다.